카테고리 없음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김장수, 푸른사상, 초판

strand guy 2023. 7. 16. 21:32


#김장수
드디어 저자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를 지은 작가로서 소개가 없길래 무슨 유령 작가라도 되나 했더니 그렇진 않았다. 독일문화와 역사에 대한 석학이었다.

#계몽주의
학교 다닐 때는 많이 듣던 단어이고 조선말에 개화, 계몽을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사실 계몽이란 단어는 근대 유럽에서 먼저 나온 말이다. 한자는 “꿈을 깨우다”정도 일 것 같다. 영어로는 education이라고도 하니 '교육'과도 뜻이 통한다.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녀는 당시 계몽주의에서 요구하던 교회의 예속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이들을 중세의 어둠으로부터 자유 및 평등이 구현되는 사회로의 이행에 대해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향후 교육적 기회를 여아들에게도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쉽게 생각하면 교육의 주체가 교회에서 국가로 바뀌고 모든 아이들에게 의무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쉽고 명확하다.

#프랑스어
18세기 유럽사회는 프랑스어가 공용어였다. 쉽게 생각하면 현재 국제사회의 공용어가 영어이듯이 그 당시에는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도 프랑스어를 사랑했고 프랑스문화도 사랑했다. 이때 불현듯 드는 생각은, 그렇담 지역마다의 의복이나 음악, 미술, 문화의 차이가 있었을지 궁금하다.
현재 공용어로 영어를 쓰는 나라의 의복이나 사회전반이 비슷하듯이 그 당시에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들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왕국 내 다양한 언어의 공존으로 외국어 습득을 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어는 뒷전으로 밀렸다. 이러한 연유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대의 국제공용어인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지역과 관련하여 헝가리 공용어인 라틴어는 물론이고, 궁중문화와 궁중예식에 많이 사용되는 이탈리아어와 에스파냐어도 배웠다.

나름 결론: 독일어는 존재가 미미한 것 같다. 마치 같은 시대 한글(언문)처럼 말이다.

#100명중1명
출산이란 역시 목숨 걸고 했던 거고 반대로 그만큼 목숨의 값어치가 낮았다고 해야 할까. 출산만이 아니고 이 책을 읽으며 자주 나오는 죽음의 원인인 천연두이다. 300년 전에 사람과 현재의 사람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37년부터 1756년까지 모두 16명의 자녀를 출산했는데 이 중에서 4명의 아들과 6명의 딸들만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20세였던 1737년에 첫딸을 낳고, 39세였던 1756년에 막내아들을 출산한 것으로 보아 20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16명의 자녀를 낳은 것이 다. 이 당시 임산부의 사망률은 1천 명당 11명에서 12명에 달했는데 이 수치는 오늘날의 10만 명당 11명과 비교할 때 거의 100배나 높다고 하겠다.



#초상화
조선시대에는 초상화가 별로 없다. 동양과 서양의 차일수도 있지만 동양권은 그림이 별로 없다. 다만 일본은 좀 다른 것 같다. 일본은 기록물로 그림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서양에 그림이 발달한 이유가 설명이 되어 있다. 초상화는 정략결혼에 사진처럼 이용되었다고 한다. 결혼은 당시의 가문을 유지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는 강력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초상화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당시 왕족이나 귀족들의 결혼은 거의 초상화를 통해 이뤄졌는데 이사벨라의 초상을 본 요제프는 즉시 그녀의 외모에 반해버렸다.


#억지력
경쟁사회라는 가정하에 주변국에 약점을 보이면 바로 공격을 당하는 게 현실이다.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상대의 공격을, 도발을 시작할 수 없는 억지력이 필요하다.
프로이센은 작은 나라임에도 큰 나라를 선제공격해서 필요한 목적을 성취했다.
요즘 같은 현대사회에서도 통하는 말일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라든 사람이든 억지력, 돌려 말하면 안정감, 아우라,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프리드리히는 왜 선제공격을 감행했을까? 내가 읽어본 그는 공격성이 있거나 나라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말이다.

당시 프로이센 영토는 오스트리아의 6분의 1인 12만 제곱킬로미터였고 인구 역시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2세는 즉위한 직후부터 오스트리아로부터 면적 4만 제곱킬로미터의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아야만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 12월 16일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도 없이 32,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슐레지엔 지방의 여러 지역, 즉 게른도르프, 브리크, 리그니츠, 볼라우를 선제 공격했다.


#관방학
독일역사, 프로이센 역사에서 항상 나오는 단어.
우린 단어를 들을 때 감정적으로 먼저 듣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식민지’라는 단어도 왠지 패배, 굴욕, 노예라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18세기 기준으로 그런 생각이 맞는 걸까? 아래 내용에서 다시 새롭게 생각해 볼 만해서 붙여봤다.

그는 관방학(Kameralismus)이라 지칭되는 중상주의 정책도 펼쳤다. 이것은 낙후된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정책은 대외교역보다 국내의 농업 및 산업 활성화에 비중을 두었는데 그 이유는 자본의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산업자본의 부족, 판매처 역할을 담당할 해외 식민지의 부재 등으로 경제적 여건이 성립되지 않아 국내에서 부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방학은 본질에 있어 소극적 내지는 방어적이었고 타국을 지배하기보다는 오히려 서유럽 여러 나라들의 압박에서 벗어나 려는 의도를 가졌다 하겠다.


#로코코시대의_남자 #순결위원회
권력도 있고 건강(예전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건강, 즉 확률적으로 질병에 시달리지 않고 제명에 사는)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여성을 쫒는 것 같다. 결혼도 중요하고 자녀도 중요하지만 18세기의 남자는 이랬던 것 같다.
갑자기 근대문화사 책이 떠오른다. 로코코시대는 미성년 강간이 쉽게 일어나던 시기라고 했는데, 왕족이 이랬다면 일반 시민 계층은 어땠을까 궁금하긴 하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18세기 유럽의 평균적인 모습은 어땠을까?
덧붙여, 역시 성적인 이야기는 귀와 눈을 쫑긋하게 한다.
더불어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 1세의 바람끼 때문에 “순결위원회”를 창설한다. 2023년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극과 극으로 표현할 수 있는 대목인 듯하다. 왜냐면 개인적인 감정을 나라 전체의 정책으로 추진했고 그에 따른 징벌이, 책을 읽어보니 좀 과했기 때문이다.
웃긴 결론은, 여자의 적은 결국 여자라는 것. 권력이 있어도 사랑하는 남자의 행동을 제약하진 못하고 그와 가까이 지낸 여자를 괴롭히고, 그녀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여자에게 징벌을 내리고 있다.

프란츠 1세가 마리아 빌헬미네 아우스페르크(Johan Adam Joseph v. Auersperg) 공작부인을 사랑할 때 그의 나이는 49세였지만 공작부인은 19세에 불과했다.
…(중략)…
프란츠 1세는 공적인 장소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품위와 명예를 위해 최대한 배려했다. 그러나 여왕이 면전에 없을 경우, 언제나 공작부인의 특별석에 나타났으며 오페라 관람 시에는 관객이 보지 못하게끔 몸을 숨기기 위해 습관적으로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들 이 차지한 특별석은 아무도 못 들어오도록 폐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1세가 간간이 하던 기침으로 그의 존재 및 비밀은 세상에 다 알려졌다. 프란츠 1세는 마리아 빌 헬미네 아우어스페르크 공작부인과 은밀히 지내기 위해 락센부르크 근처에 있는 빌라를 구입하여 그녀에게 선물했다. 뿐만 아니라 레오폴트 대공 결혼식에 그녀를 정식으로 초대하는 과감성도 보였다. 따라서 당시 빈 왕궁의 사람들은 마리아 빌헬미네 아우어스페르크 공작부인을 프라츠 1세의 연인(Liebhaberin von Franz I)'으로 칭했다.


#프란츠1세 #요제프2세 #마리아테레지아
결론적으로 이 책에서는 아들은 아버지를 싫어했고 오히려 이웃나라 경쟁국의 군주를 더 좋아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반대로 부인이자 엄마는 남편을 지극히 사랑한 여자로 서술하며 아들에게 강한 모성애를 표현하고 있다.

요제프 2세는 모든 남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군사 경력에서 성과 없는 인물을 존경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부친을 인생의 실패자로 간주했다. 점차 요제프 2세는 부친과는 달리 영토 확장을 통해 군사적 명성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거기서 프리드리히 2 세를 자신의 멘토르(Mentor)로 설정했다. 아마도 프리드리히 2세와 마찬 가지로 요제프 1세 또한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의 『군주론(Il Principe)을 읽고 그의 관점을 추종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총평
작가는 마리아테레지아를 “결단력과 여성성을 겸비하고 의무 이행과 성실성 및 도덕성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한 군주”로 평가하며 오스트리아인이 현재도 앞으로 사랑할 것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개인적인 평가는 성공보다는 실패, 현상유지 정도라는 느낌을 받는다. 역시 그 반대의 느낌은 프리드리히 2세가 가져갔다고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한편으로 여성 군주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여성으로서 실제 전쟁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또는 여성이기에 주변국이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카우니츠-리트베르크 같은 유능한 재상도 있었지만 여성-대립-경쟁-패배라는 순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쨌든 같은 저자의 “프리드리히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를 읽었다. 인물을 알게 된 점도 좋았지만 더 좋은 건 바로크-로코코 시대를 잠시 여행하고 온 점이 좋았다.
아쉬운 건 시오노 나나미 책처럼 지도가 곁들여져 베를린, 슐레지엔, 빈, 바이에른, 토스카나, 브레슬라우 등등이 표시되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

#폴란드
마지막으로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폴란드는 항상 약체였다. 왠지 동병상련 같은 동지감이 느껴진다.
쉽게 사라진 폴란드…

그런데 내분에 지친 폴란드는 주변 열강들의 일반적 결정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분할에 참여한 3개국은 1775년 폴란드의회로부터도 합법적인 동의를 쉽게 얻어냈다.
(중략)
1797년 3국은 폴란드 문제가 영원히 해결된 것으로 합의했고, 폴란드 왕국이란 이름을 더 이상 쓰지 않기로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