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가 된 임진왜란, 김동철 지음, 선인, 초판 1쇄, 2022년

#들어가며
책에 컬러 사진도 많아서 골라봤더니 역시 비싼 책이다. 정가가 무려 5만 원.
하지만 역시 컬러라서 보기가 좋다.
우리나라 역사는 읽으면 항상 한숨이 나와서 잘 안읽지만 “임진왜란”은 항상 관심이 가는 주제이다.
삼국의 가장 큰 전쟁이기도 하고 역시 전쟁은 인간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킨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이야기” 1편 책에서 나온 것 처럼 전쟁은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항상 궁금했던 일본이나 중국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볼까하는 점이다.
이러한 궁금증을 이 책을 통해서 약간 풀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임진왜란과_근대엽서
책에서 여러가지 원인을 나열해 준다. 이 모든 원인들이 임진왜란을 유발시킨 것들이리라.
첫째, 명을 정복하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의 명예욕•공명심 •영웅심 등 복합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어 났다는 설이다.
둘째, 정치적으로 전국다이묘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설이다. 일본 국내의 내적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 그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기 위한 돌파구로 조선을 침략했다는 영토확장설이다.
셋째,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1547년 이후 단절된 대명 감합무역을 부활하기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명을 목표로 하는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이다. 즉, 경제적으로 교역상의 불리함을 타파하려는 체제변혁 전쟁이다.
넷째, 동아시아 대외관계의 변동 속에서 파악하려는 국제질서 변화설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히데요시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인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체제를 변동시킬 목적으로 일으켰다는 설이다.
다섯째, 전국다이묘의 갈등과 불만을 해외에서 해소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군
사력과 경제력을 소모시켜, 히데요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원인이라는 설이다.
여섯째, 포루투갈과 에스파냐 등 이베리아(유럽) 세력에 대한 일본의 저항이 아시아 침략을 초래했다. 즉 동아시아 세계 주변왕조로서의 일본의 중화황제화 욕구가 발발의 원인이라는 설이다.
책을 읽어보니 처음엔 첫 번째 이유로 전쟁을 시작한 것 같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유가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명을 치려 했지만 정유재란에선 조선 삼남지방 획득이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전쟁전야_16세기의일본
어쨌든 일본은 16세기 전반에 유럽과 교류가 있었고 그 교류는 인적, 물적 교류였다.
16세기 중반부에는 모두 알지만 조총도 만들고 유럽으로 사절단까지 보낸다.
이런 것들만 봐서는 일본은 16세기부터 유럽과 대등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영향을 주어 18세기 초에는 “걸리버여행기”에서 일본이 등장하는지도…
그리고 그 와중에 크고 작은 “왜변”, “왜란”이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있었고 16세기 전반에 그 관계가 끝나고 이것이 “임진왜란”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도요토미히데요시의_국내통일과_대륙침략구상
1590년 통신사 일행에게 조선국왕에게 보낸 답서 중 책에서 언급한 4가지이다. 재미있어서 옮겨본다.
1) 어머니가 나를 잉태했을 때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이 꿈에 대해 복술사(점장이)는 "아이가 장차 크면 온 세상에 어진 교화를 드날리고, 천하에 용맹한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했다.
2) 대명국으로 들어가 일본의 풍속을 중국 400여 주에 전파하고, 본의 통치력을 영원히 심어두려고 한다.
3) 내가 명나라로 출병할 때 조선이 군사를 이끌고 도와주면, 우리의 맹약은 더욱 굳게 될 것이다.
4)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위대한 이름을 삼국에 드높이는 것이다. 이 4번째 내용은 임진왜란의 원인 가운데, 동아시아 정복의 목적이 공명심에 있다는 설의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모, 대단한 자부심과 자신감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멘트가 있었을까 싶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항상 눈치 보며 사는 사람이 눈치 안 보고 떳떳하게 사는 사람을 볼 때의 느낌이랄까…
(자신감은 스스로를 믿는 마음, 자부심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이라 한다)
그리고 만약 조선과 일본이 한편이 돼서 명나라로 갔으면 어땠을까? 가정법이지만 재미있는 상상이다.
그리고 그 “풍신수길”은 전혀 이름 없는 하급무사의 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남자이다.
당시 시대에서 족보가 중요한 부분이었을 텐데 “다이묘”까지 오를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전쟁” 속이기 때문이리라…
히데요시는 1561년(25세)에 네네와 결혼했다고 한다. 1573년 노부나가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이어 아자이 나가마사를 공격하여 무너뜨릴 때 히데요시는 큰 전공을 세웠다. 이에 1573년(37세)에 하시바 히데요시로 개명하고, 1574년(38세)에 치쿠젠 노카미를 쓰면서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다
#1592년_1차조선침략전쟁_임진왜란
예전에 궁금해했던 부분도 풀렸다.
일본은 규슈에서 쓰시마섬을 거쳐 부산에 오는데 그 당시엔 얼마나 걸렸을까?
사실 쓰시마는 일본 영토이니 시간이 의미가 없을 거고 중요한 건 쓰시마에서 부산까지 시간이다.
답은 9시간 걸렸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에 종군했던 교토 하나조노 묘신지의 텐케이가 쓴 종군일기인 「서정일기」에서는 임진왜란 첫 출전의 장면을"12일(조선력 13일, 필자) 맑음, 병선 7백여 척이 오전 8시경 오우라를 출발하여 오후 5시경 부산에 도달했다.
#책을마치며
책 중반 이후부터는 개략적으로 읽어나갔다.
기분 나쁜 건 1811년 이후 일본과의 교류는 다시 끝났다.
그리고 100년 후 일본은 다시 침략하여 풍신수길을 들먹이며 한반도를 다시 유린하였다.
그 100년 사이 삿초동맹은 에도막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유신시대를 열어 조선과는 ‘통신사’가 아닌 직접 교류를 원했다.
그 와중에 일본은 유럽과의 직접교류가 계속 있었던 것으로 침작이 된다.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세계정부가 신정부를 인정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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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역사적으로 큰 내전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한반도를 침략했다.
전국통일을 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랬고, 세키가하라전투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만 평화를 선택했고, 삿초동맹과 막부세력과의 보신전쟁 후에는 메이지정부가 병합준비위원회를 비밀리에 만들어 진행했다.
갑자기 든 생각이지만 임진왜란 때는 100만 명 정도의 조선인 사상자를 만들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일본에 대한 분노가 오른다. 그래도 다시 이성적으로 돌아가서 타국에 대한 분노에 앞서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게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론: 주변을 의심하고 경계하라.
(조심=실수하지 않도록 마음 씀, 의심=믿지 않는 마음, 경계=뜻밖의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함)
결론: 일본은 진짜 가깝고도 먼 나라
역사책에서 일본을 보면 볼수록 유럽과 비슷하고 그것이 자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