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
일본은 조선과 전쟁을 하러 온 것 인가? 아님 명을 치기 위해 들어온 것인가?
그래서 이 책을 다시 찾아 읽어보았다.
75쪽
이 점은 당시 일본군에 내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인장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중략)
-.(5) 조선왕이 일본으로의 입조를 승낙하면 규정한 서열대로 순차로 상륙할 것이며, 만약 입조를 거부하면 선박을 부근 도서에 집결하고 전군이 서로 협의한 후 규정한 서열 여하에 관계없이 일시에 조선의 여러 포구에 상륙하여 진지를 선정하고 축성 공사를 견고히 하라.
108쪽
임진년 4월 13일, 아무런 저항도 없는 상태에서 부산진에 당도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조선 강토를 유린하였다. 부랴부랴 파천을 결정한 조정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쫓겨 갔고, 성난 파도처럼 밀어붙이던 일본군은 의기양양했다. 그러한 가운데 일본 측의 요구로 선조 25년(1592) 6월 초순, 첫 번째 강화 논의가 시작되었다. 대동강에서 열린 이 회담에서 조선 측은 이덕형이, 일본 측은 야나가와 노리노부, 승려 겐소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러나 이 회담은 조선 측의 ‘무조건 철수’와 일본 측의 ‘명나라를 칠 터이니 길 을 빌려달라(즉 가도입명 假道入明)’는 양측의 입장만을 확인한 채 결렬 되었다.
나이든 40대가 되니 일방적인 역사지식 보다는 입체적인 지식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선악이나 호불호와 같은 감정적인 지식보다 일종의 “밸런스게임” 처럼 어느 한쪽도 편들기 어려운 입체적인 지식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그래서 조선은 왜 일본의 가도입명을 거부했을까? 그놈의 명분과 국가 자존심 때문일까? 곧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낼 것이고 그러면 다시 기존 질서로 금방 돌아갈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비슷한 상황으로 이승만이 부산에서 포기하지 않고 대치한 것도 비슷한 사고과정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버는 것도 결과적으로 조선의 피해가 심해서 갖는 생각이지만 당시 당사자로 돌아가면 나 또한 도박 배팅하듯 결정하지 못하고 결국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조선과 명(중국)의 관계는 이백년 동안 굳어진 동맹(?)관계이고 일본은 아무런 신뢰가 없는 관계라고 할까? 중국이 피해를 준것도 있지만 당시 세계관에서 중국과의 동맹은 미래를 지속하는 가장 큰 동아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110쪽
이처럼 전쟁 초기에 조선은 국방 태세에 큰 허점을 드러내며 패배를 거듭하였는데, 그 주요 원인은 잘 조련된 상비군의 부재와 지휘 체계의 혼동, 그리고 민심의 이반 등을 들 수 있다.
아쉽게도 책에서 민심 이반이 어떤 뜻으로 적은 건지 자세한 설명은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건 민심은 현재 조선 정부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유전적 기질 같기도 하다)
어쨌든 조선반도의 민심은 국가에 대한 기대심도 없고 열도에서 온 이방인에 대한 기대심도 당연히 없다.
그가 남긴 기록에는 의병이 마치 일본군을 습격하여 군량을 빼앗는 도적 떼와 같이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군이 보급로를 차단당한 사실이다. 보급로가 차단된 일본군은 이미 확보한 군량만으로 겨울을 지내야 했고, 현지에서의 군량 조달을 독려할 수밖 에 없었다. 그러나 현지의 군량 징발은 여의치 않았고, 이 때문에 일본 군은 새로운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초 일본군은 조선 땅을 점령하면 백성들이 일본에서처럼 새 주인에게 항복하고 조세를 바칠 것으로 예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 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백성들은 산으로 도망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의병에 가담하였다. 특히, 일본군이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각 지역을 약탈하고 살육을 자행하자 조정을 원망하던 백성의 민심이 침략군을 응징하자는 쪽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