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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마지막 키스, 프레더릭 모턴 지음, 이은종 옮김, 주영사, 2012년

lt.n.se 2024. 8. 8. 00:25

 


책 내용에서 구한말을 보았다.
우리 역사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다.
역사의 전성기든 쇠락기든 모두 그 나라 사람들의 선택과 집중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1888년 비엔나의 모습에서 같은 시절의 구한말을 느껴본다.

그리고 비엔나에는 허영이 넘쳤다. 1888년, 런던의 몇몇 유서 깊은 클럽은 상인들이 들어와 즐길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비엔나의 유서 깊은 클럽이라고는 경마장밖에 없었지만, 그곳은 여전히 귀족들만 들어갈 수 있었고, 상인들은 종업원 출입구를 통해 들고 나왔다. 아무리 높은 돈방석에 앉았다 해도, 비엔나의 중산계급은 귀족보다 한참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결코 억만장자의 위세를, 또는 파리의 상류 중산계급의 자부심을, 미국 상인의 활력을 가질 수 없었다. 비엔나에서는 봉건주의의 후광이 너무나 밝고 끊임없이 비쳤기에 막 피어오르던 중산계급의 라이프스타일은 모두 말라 죽었다.


패션에 대한 정의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설명해 준다.

물론 패션은 여성의 한 무기로 간주한다.

패션 기사에 자극을 받은 중산계급의 상위에 속하는, 신분 상승 욕망이 강한 수만 명의 부유한 사람들은 매일 "센스“를 갈고닦기에 분주했다. 이제 최신 유행의 코르셋과 허리받이를 아는 것이 중요해졌다. 남자들에게 주식과 채권이 중요하듯, 신문을 읽는 인구의 절반인 여자들에게 패션이란 자신이 얼마나 앞섰는가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다. 패션은 어떻게 하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부단히 연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패션은 어떤 사회적 지위에 있는 남자에게 사로잡히기 바라는지를 암시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전쟁의 정의가 이 책에서도 나온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한꺼번에 모든 난제를 해결하는 수단.

전쟁이란 극적인 결말이자 세상을 속히 구원해 줄 아름다운 폭발로써, 현재의 무기력을 해결해 줄 멋진 수단이었다.
(중략)
전쟁은 오지 않았다. 대신 1888년 10월, 메리 베체라가 왔다.


하지만 결국 여자가 도피처가 된 것 같다.
영웅이 영웅이 되어야 하는데 영웅이 되지 못하면 순정남이 되나 보다.
어쨌든 여자는 남자에게 판타지를 주는 모양이다.

 


#죽음으로 자유를 얻다
결국 황태자의 죽음을 암시하는 문장이 나왔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하면 안 되었다. 아무것도 만져서는 안 되며, 아무것도 말해서도, 아무것도 생각해서도, 아무 행동도 해서는 안 되었다. 황태자는 한껏 충전한 다음 텅 빈 곳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며 돌아다니는 보석관을 쓴 꼭두각시였다.

 


#충격에 빠진 비엔나
결국 부자갈등이 주원인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13세기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을 죽였고,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와 루돌프는 아들이 자살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황제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편지 한 통도 없었다. 간단한 메모 한 줄도 없었다. 심지어 편지들 속에 아버지를 향해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죽음으로 억눌린 비엔나
이 책을 놓지 못하게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422쪽에서 나온다.

왕관마저 버리며 불안을 떨쳐 버리려 했던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4월 6일, 비엔나의 동맹국인 세르비아의 밀란 왕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왕위를 버릴 분명한 이유가 없었다. 명목상으로는 그의 12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반오스트리아 물결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것은 약 30년 뒤 제국을 1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어 무너뜨렸던 격랑의 첫 소용돌이였다.


그리고 ‘범게르만주의’와 ‘반유대주의’는 이 책에서 자주 나온다.

당시 독일계 나라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컸다.

반유대주의는 이 3월의 불쾌한 상황을 더욱 부추겼다. 18일에 치러진 시의회 선거는 반유대주의 논쟁으로 들끓었다.

 


#다시 봄은 오고
그 당시 비엔나는 유럽의 대표적인 도시로서 동유럽 사람들의 교류가 많은 곳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당시에 유대인은 국가건설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 계획은 이루어 냈다.

헤르츨은 비난의 대상을 정확히 알았다. 사실 그야말로 선동의 귀재였다. 그는 나중에 그 선동 기술을 진정한 영감으로 승화시킨다. 1895년 드레퓌스 사건으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이 번쩍 뜨였을 때, 그는 선동 기술자로 완전히 무장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한다(당시 그는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의 파리 특파원이었다). 그는 시온을 향한 유대인들의 오랜 갈망을 어떻게 정치운동으로 만들지를 알았다. 시오니즘운동을 한 편의 멋진 드라마로 꾸밀 줄 아는 사람은 헤르츨 밖에 없었다. 고상한 매너의 비엔나 멋쟁이가 1897년에 열린 첫 번째 시오니스트 대회에 참석하는 모든 대표에게 실크해트와 연미복을 입고 오라고 주장한 것도 기자와 카메라의 위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헤르츨은 쇠네러와 뤼거가 있는 비엔나에서 유대인으로서 모멸감을 느끼며 깨달은 교훈을 거울삼아 기독교도와 같은 위풍당당한 태도로 자신의 동포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했다. 그가 시오니즘운동을 이끌기 전까지 세계는 유대인을 구질구질한 게토에 사는 광신도쯤으로 여겼다.헤르츨의 대외 선전 기술 덕분에 시오니즘운동은 "서구화된" 위대한 국제운동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마무리
1889년 당시에 비엔나에 살았던 천재들을 같이 등장시켜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한다.
황태자 루돌프뿐만 아니라, 구스타프 클림트, 브람스, 프로이트, 요한 스트라우스 등이 등장한다.
개인적인 느낌은 프로이트나 클림트나 우울한 느낌에 결국 비엔나 도시 전체에서 물려받았다고 생각이 된다.
프로이트 같은 정신과 의사가 탄생한 것도 그 당시 비엔나 자살률이 보여주듯이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가 많았고 이를 의사가 치료하면서 정신의학이 발전했다고 생각된다.
책의 전체적인 요지는 당시의 비엔나는 불안하고 우울한 도시였다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역시나 가장 의미 있는 인물에 대한 ‘표시’도 책에서 해놓고 간다.

심지어 황태자마저 되살릴 수 있어 보였다. 그의 유령은 여기저기서 출몰했고, 그에 관한 전설은 온 제국에 떠돌았다. 어떤 이는 심지어 루돌프가 부활절 주간에 아이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부활절 전날인 4월 20일 토요일 오후 4시, 모차르트의 <테 데움>이 루돌프의 독신자 숙소에서 몇 미터 떨어진 궁전예배당에서 울려 퍼졌다. 안톤 브루크너 교수는 웅장한 화음과 멜로디로 메시아의 부활을 축하했다. 거장의 웅장한 노래가 예배당 천장으로 울려 퍼질 때 브루크너의 고향 북부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에서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그날 오후에 태어난 한 아이의 가르다란 울음소리였다. 아이의 부모는 알로이스와 클라라 히틀러였다. 부모는 아이의 이름을 아돌프라고 지었다.